통일신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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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덕 (向德, 미상)
향덕은 신라 경덕왕대 효순(孝順)이라 불릴 만큼 명망 높은 효자였다. 755년 기근이 들고 유행병이 돌아 사회가 매우 혼란하였다. 향덕의 부모도 병들고 가난하였는데, 특히 향덕의 어머니는 종기가 나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이에 향덕은 밤낮으로 어머니를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이고, 종기가 난 곳을 빨아 편안케 하였다. 향덕의 효행이 널리 전해지자 경덕왕은 벼 300곡(穀)과 집 한 채,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하사하였다. 이어 비석과 정려문(旌閭門)을 세워 효행을 특별히 기록하였다. 현재 향덕의 비석은 전해지지 않으나, 정려문은 주춧돌이 남아 전하고 있다.
한편 향덕의 효행은 유학자들 사이에서 다소 논란이 될 여지가 있었다.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 부모를 봉양하는 행위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처음이다(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라는 유교이념에 위배되고, 부모를 위해 신체를 상하게 하다 자칫 부모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저지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부식(金富軾)이 한유(韓愈)의 고사를 들어 칭찬하였듯 향덕의 효행은 대체로 높이 평가되었다. 향덕의 효행은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두 차례나 비석이 세워졌다. 향덕 비는 현재 충남 공주시 소학동 국도변에 있다. 이곳 ‘혈흔천(血痕川)’은 향덕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내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물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했다는 의미에서 ‘혈흔(핏자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경흥 (憬興, 미상)
경흥은 통일신라시대에 활동한 백제 유민이다. 18세에 출가하여 경(經)‧논(論)‧율(律)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학덕을 겸비하여 상하를 막론하고 명망이 높았다. 문무왕(文武王)은 아들 신문왕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경흥법사를 국사(國師)로 모실 것을 유언하였다. 이에 신문왕 때 국로(國老)에 봉해지고 서울(경주) 삼랑사(三郞寺)에 머물렀다. 경흥은 삼미륵경소(三彌勒經疏)에서 자은(慈恩)의 학설을 11회 이상 인용할 정도로, 당나라 현장(玄獎) 법사 문하에서 신라계 원측(圓測)과 쌍벽을 이룬 중국계 자은 규기(慈恩 窺基)의 학설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미타신앙이 한창 유행할 때 미륵신앙을 고집하면서도 신앙에 우열을 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것만 고집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뛰어난 고승의 자질을 갖춘 것을 의미한다. 경흥의 높은 덕은 승려 현본이 찬술한 삼랑사비에도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하는데,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경흥의 수많은 저술은 그가 원효성사(元曉聖師)에 못지않은 교학(敎學)의 대가였음을 알려준다.